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라페준타 제국 (문단 편집) === [[팔레올로고스 왕조]]와의 대립 === 1263년, 제국을 다시 중흥기로 되돌린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트라페준타 제국)|안드로니코스 2세]] 메가스 콤니노스(1263~1266)가 제위에 올랐다. 일 칸국의 신하국이 된 룸 술탄국은 트라페준타 제국을 다시금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누일 1세가 겨우 되찾은 시노페는 룸 술탄국의 공격에 함락당하며 제국의 중흥기에 제동이 걸린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3년 만에 사망하고 이복동생인 [[게오르기오스(트라페준타 제국)|게노르기오스]] 메가스 콤니노스 플라노스(1266~1280)가 뒤를 이었다. 게오르기오스는 곧 [[루이 9세]]의 동생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 된 [[샤를 드 앙주]]가 주창한 반 동로마 제국 동맹에 가입했다.[* 이 동맹에는 동로마 제국의 교회 통합 반대파도 끼어 있었다.] 이 동맹의 결성과 여기에 대한 맘루크 왕조의 개입은 [[동로마 제국]]의 동맹이며, [[룸 술탄국]]을 대신하여 게오르기오스의 상전이 된 [[일 칸국]]의 칸, [[아바카]]를 화나게 했다. 아바카는 당장 그를 소환하여 포로로 붙잡았다. 이리하여 포로 생활을 하던 중, 1280년 트라페준타에서 정변이 일어나 [[요안니스 2세(트라페준타 제국)|요안니스 2세]] 메가스 콤니노스(1280~1284, 1285~1297)가 제위에 올랐다. 요안니스 2세는 그를 잠재적인 적으로 보고 있는 팔레올로고스 황가로부터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 군주'라는 칭호를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는 전임자들의 선례를 자신이 깰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이것을 거절했다. 그는 [[샤를 드 앙주]]와의 동맹을 그대로 유지하며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유도하였으나, 미하일 8세가 좋은 조건으로 자신의 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마지못해 콘스탄티노플의 동맹자가 되겠다고 서약했다. 그 댓가로 그는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이베리아]], [[페라테이아]]와 모든 동방령의 황제'라고 자칭했다. 그러나 자신의 가문을 대 콤니노스라고 표기할 수 있는 권한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는 결혼을 위해 트라페준타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여동생 [[테오도라(트라페준타 제국)|테오도라]]는 조지아인들의 지원을 받아 1284년, 자신을 여제라 칭하고 제위를 찬탈했으나 그녀는 요안니스 2세가 귀국하자 곧바로 쫓겨나고 말았다. 요안니스 2세가 동로마 제국의 동맹이 되자, 똑같은 동맹자로서 상전으로서의 입지가 약해진 일 칸국은 그에 대한 압박을 서서히 완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트라페준타 제국의 경제적 번영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이제는 투르크 족과 조지아 인이 제국을 동서에서 침공하기 시작했다. 또, [[교황]] [[니콜라오 4세]]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는데 당연하게도 요안니스 2세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돈은 벌어야 했기에 서유럽 상인들과 좋은 관계는 그대로 유지했다. 요안니스 2세는 어려운 치세를 이겨내고 1297년 사망하여 트라페준타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